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이괄의 난과 호란 관련 === 이괄의 난이 호란의 발발에 영향을 준 것은 주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당장 후금을 방어할 북방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는데, 이괄의 난 이후 호란 때 조선군의 북방 방어 태세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심지어 이괄의 난의 패잔병 일부는 후금에 항복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 후금의 쾌속 진격에 기여한다.[* 6.25 당시의 상황으로 예시를 들면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남침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당시 경기도 지방을 방어하던 1사단과 7사단이 쿠데타로 인해 증발해 수도 사단 혼자서 북한군 대부분을 막아야 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가 가장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전방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돌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기 때문. 만약 북에서 이 움직임을 알고 무력 도발이나 더 나아가 남침을 했다면 그야말로 남한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입을 빌어 '설마 (노태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은 안하겠지?'라고 비난한다.] 병자호란 시에 인조나 척화파를 옹호하는 역덕들은 당시 청나라가 물자난에 고전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들면서, 이괄의 난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날 수 있게 한 정묘호란 자체가 없었기에 후금은 세력을 키우기도 보다 어려워졌을 것이고 물자 보충도 힘들어 더욱 고전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와 같은 세력 규모를 얻어낼 가능성도 희박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수탈하여 군자금을 모은 청나라군이 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즉: 만주의 식량난→이괄의 난으로 망가진 조선을 쳐 식량을 탈취한다(정묘호란)→조선의 식량을 먹고 명을 밀어낸다→이자성의 난으로 만주의 방비가 줄어든 틈을 타 조선을 정복한다(병자호란)→조선의 식량을 왕창 먹고 명을 친다... 식의 구도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괄의 난 때문에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확장 정세를 보면 이괄의 난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크게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괄의 난 직후인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참패하고, 누르하치는 전사 혹은 전상을 입고 사망하며, 이어 홍타이지가 뒤를 잇는다. 홍타이지는 이후 명나라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자신의 배후지를 확고히하는 전략을 펴는데, 그 첫타깃이 바로 [[정묘호란]]이었다. 후금은 조선을 손쉽게 굴복시키고 명나라와의 동맹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 조선을 침공한 후금군은 이번에는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1630년대까지는 [[감숙성]]까지 진출하여 [[내몽고]]를 완전히 복속하고 [[북원]]의 옥새를 얻어 대칸을 자칭하며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다. 그 사이에 명나라는 내분이 일어나 1629년 원숭환이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을 제거함으로써 동부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사라진다. 게다가 더 한심한 것은 영원성에서 후금군을 저지한 [[원숭환]]마저 1630년 숭정제에 처형된다. 이렇게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 조선의 어설픈 중립 외교에 명확한 답을 원한 청에 의해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런 여러 사건의 한 부분이 이괄의 난이지, 이괄의 난 때문에 갑자기 청나라가 힘을 키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호란의 원인은 [[임진왜란]]이나 [[명나라 F4]]가 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병자호란의 패전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로 잡힌 것이며, 그 원인은 청나라는 정묘호란 당시 수군이 전혀 없었지만,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이후, 모문룡의 부하들이 100여척의 전선을 가지고 청나라에 망명하면서부터 수군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는 농민반란이 너무나 심각해져서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인 섬서성쪽으로 보냈기 때문에 청나라군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조선에 대군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인조는 장수로서는 심히 부적격한 김경징과 장신을 강화도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두 사람은 애초부터 능력이나 세간의 평가가 매우 나빴던 자였고, 이런 자들이 강화도 방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사 참사는 인조의 책임이니, 양 호란의 패전은 이괄의 난 보다는 인조나 척화파들에 더 책임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